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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대의민주주의 체제에서 '정치가(Politician)'와 '지도자(Leader)' 사이에는 좁힐 수 없는 심연이 존재한다. 정치가는 다음 선거의 당선과 소속 정파의 이익 연장을 위해 투쟁하지만, 진정한 지도자는 다음 세대의 생존과 국가 공동체의 항구적 번영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정치적 생명을 제단에 바친다. 안타깝게도 대한민국의 정치는 심각한 '지도력의 부재'라는 위기에 직면해 왔다. 국가적 재난이나 정책 실패 앞에서도 행정적 절차의 뒤로 숨어 궁극적 책임을 회피하려는 권력자들의 태도, 그리고 국가의 미래 비전이나 거시적 담론 보다는 당내 패권 장악과 차기 공천권이라는 전리품을 두고 이전투구를 벌이는 집권여당의 노선경쟁은 '지도자 없는 민주주의'의 전형적인 병폐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정치인이 직면하는 가장 근본적인 윤리적 딜레마는 자신의 '정치적 생존(生)'과 국가 공동체가 요구하는 '공익적 대의(義)' 사이의 충돌이다. 동양 정치철학의 거두인 맹자(孟子)는 곰 발바닥과 물고기의 비유를 통해, 두 가지를 모두 얻을 수 없다면 마땅히 생명을 버리고 의로움을 취해야 한다는 '사생취의(捨生取義)'의 철학을 확립했다. 당파적 이익과 권력 유지라는 단기적 이익(물고기)을 버리고, 국가의 미래와 구조 개혁이라는 공익적 책임(곰 발바닥)을 취하는 것이 지도자의 본분이다. 그러나 작금의 정치인들은 맹자가 경고한 대로 도덕적 '본심(本心)'을 상실한 채, 알량한 권력과 맹목적인 파벌 투쟁에만 몰두하고 있다.

막스 베버(Max Weber)는 『직업으로서의 정치』에서 관료와 정치가의 사명을 엄격히 구분했다. 관료는 비당파적인 자세로 상부의 명령에 따라 직무를 수행하는 것이 책임윤리지만, 정치 지도자는 자신이 행사한 권력과 그 예견 가능한 모든 결과에 대해 포괄적인 '책임윤리'를 져야 한다. 위기 앞에서 "선의에서 비롯된 정책"이라거나 "나의 지시에는 법적 하자가 없었다"는 식의 변명은 전형적인 관료주의적 책임 회피이자 베버가 일축한 신념윤리의 변명에 불과하다. 대통령은 결과적으로 발생한 국민적 비극과 국가적 손실에 대해 법적 하자를 넘어서는 '정치적·역사적 책임'인 십자가를 지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대안을 제시해야 할 야당 역시 제임스 맥그리거 번스(James MacGregor Burns)가 주창한 '변혁적 리더십'을 상실한 채, 얄팍한 '거래적 리더십'에 매몰되어 있다. 국가 경제의 저성장 극복이나 기후 위기 같은 거시적이고 장기적인 국가 비전을 세우고 도덕적 동기를 부여하기보다는, 공천권 확보와 팬덤의 지지라는 협소한 조건적 보상을 얻기 위한 계파 갈등에 갇혀 있다. 진정한 변혁적 지도자는 대중의 분노에 편승하는 선동가(데마고그)가 아니라, 높은 개인적 위험을 감수하고 기득권을 내려놓는 '자기희생'을 통해 추종자들을 고양시킬 때 비로소 탄생한다.

그렇다면 진정한 지도자는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가? 거창고등학교의 직업 선택 십계명 중 제10계명인 "왕관이 아니라 단두대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라"는 구절은 현대 정치에 궁극적인 결단의 메타포를 제시한다. 칭송받는 권력의 한가운데가 아니라, 표가 되지 않더라도 사회적 약자가 있는 변두리, 당장의 지지율이 폭락하더라도 100년 후를 위해 반드시 감수해야 할 희생양의 자리(단두대)로 향하는 것이 바로 지도자의 길이다.

이러한 결단은 종교적 구도자에 버금가는 '순교자적 소명의식'을 요구한다. 나치의 광기 앞에서 안전하고 명예로운 도피처를 버리고 사지로 돌아와 '값비싼 은혜(Costly Grace)'를 실천하며 대리 행위의 죄책을 짊어진 디트리히 본회퍼, 인종차별에 맞서 비폭력으로 저항하며 보편적인 선의 기준인 공의(Righteousness)를 위해 목숨을 던진 마틴 루터 킹 주니어의 삶이 이를 완벽히 증명한다. 또한,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산다(必死則生)"는 완전한 자기 포기를 보여준 이순신 장군과, 절대 권력을 스스로 반납(급류용퇴)하며 민주공화국의 토대를 다진 조지 워싱턴의 자발적인 권력 포기는 권력욕에 사로잡힌 우리 정치권에 묵직한 부끄러움을 안겨준다.

대한민국이 처한 작금의 복합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서는 기계적 제도의 개선을 넘어 한국 정치 패러다임의 혁명적 전환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꼼수로 정치적 수명을 연장하려는 요행(幸生)을 버리고, 국가와 공익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정치적 목숨을 던지는(必死) 결단이 있어야 한다. 마키아벨리즘과 포퓰리즘이 지배하는 진흙탕 속에서도 묵묵히 단두대를 향해 걸어갈 바보 같은 '순교자적 정치 지도자'의 출현이 그 어느 때보다 절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