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롤로그 】



평강시청 앞.


아침 8시 30분. 출근하는 공무원들이 시청 정문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그들 사이로,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손에는 피켓을 들고 있었다.


'사회복지법인 해맑은 비리 규명하라'


아무도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 시청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는 사람은 드물지 않았다. 공무원들은 익숙한 듯 그를 피해 걸어갔다.


남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봄바람이 그의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그는 피켓을 꼭 쥔 채 시청 건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군가 그를 유심히 봤다면, 이상한 점을 발견했을 것이다. 남자의 셔츠 가슴 부분이 미세하게 움푹 들어가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로, 셔츠 천 사이로 희미하게 비치는 것이 있었다.


흉터.


목 아래에서 시작해 가슴 중앙을 가로지르는 긴 흉터.


강민호.


그는 남들과 다른 심장을 가지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남의 심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이 얼마나 큰 의미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빌린 심장으로, 그는 진실을 위해 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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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면 1 : 두 번째 생 】



이제야 이 이야기를 할 때가 되었다.


지금까지 나는 서류를 뒤지고, 현장을 찾아다니고, 증인을 만나는 모습만을 보여 왔다. 아침저녁으로 면역억제제를 삼키는 모습, 무의식적으로 가슴의 흉터를 쓸어내리는 습관. 그런 것들은 보여 주었지만, 왜 이 심장을 갖게 되었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말해야 할 것 같다. 내가 왜 이 싸움을 시작했는지. 왜 멈출 수 없는지.


강민호가 심장이식 수술을 받은 것은 2018년이었다.


확장성 심근병증. 심장 근육이 늘어나면서 펌프 기능이 약해지는 병이었다. 40대 초반에 진단을 받았을 때, 의사는 이식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했다. 이식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그는 기다렸다. 1년. 2년. 심장은 점점 약해지고, 몸은 점점 무거워졌다.


2018년 어느 날 새벽, 전화가 왔다.


"강민호 씨 보호자분이시죠? 적합한 장기가 나왔습니다. 지금 바로 오셔야 합니다."


누군가가 죽어서, 그가 살 수 있게 되었다.


수술은 8시간 걸렸다. 눈을 떴을 때, 강민호는 자기 가슴에서 낯선 박동을 느꼈다. 이것은 내 심장이 아니다. 그러나 이제부터 이것이 나를 살린다.


그는 중환자실에서 회복실로, 회복실에서 일반 병실로 옮겨갔다. 매일 면역억제제를 먹어야 했다. 감염에 주의해야 했다. 무리한 운동은 금물이었다. 의사는 말했다.


"이식받은 심장의 평균 수명은 10~15년입니다. 물론 관리를 잘하면 더 오래 쓸 수 있어요. 스트레스 받지 마시고, 조용히 사세요."


조용히 살라고.


강민호는 그 말을 들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퇴원 후, 그는 정말로 조용히 살려고 했다. 회사를 그만두고, 연금과 저축으로 생활하며, 건강 관리에만 집중했다.


그런데 2023년 어느 날, 우연히 해맑은 법인에 대해 알게 되었다.


지인이 평강시의 한 복지시설에 부모님을 모시려다가, 이상한 소문을 듣고 망설이고 있다고 했다. 그 시설이 해맑은 법인 산하라는 것. 뭔가 비리가 있다는 얘기가 돈다는 것.


호기심에 검색을 해 보았다. 그러나 정보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정보공개 청구를 해 보았다. 서류를 받아 보니,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조용히 살라는 의사의 말이 생각났다.


그러나 강민호는 생각했다.


누군가의 심장을 받아서 산다는 것. 그것은 단순히 '살아 있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 심장이 나를 살려 준 이유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는 조용히 사는 대신, 진실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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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면 2 : 700일의 기록 】



2023년 봄부터 2024년 겨울까지, 강민호가 제출한 정보공개 청구서는 총 147건이었다.


평강시에 87건. 중부도에 34건. 영남도에 12건. 청산시에 8건. 기타 유관기관에 6건.


그중 정상적으로 공개된 것은 61건이었다. 부분 공개가 43건. 비공개가 28건. 부존재가 15건.


비공개와 부존재를 합치면 43건. 전체의 약 30%가 '알 수 없음'이었다.


강민호는 이의신청을 반복했다. 행정심판을 예고했다. 그러면 비공개가 부분 공개로 바뀌기도 했고, 부존재가 갑자기 발견되기도 했다. 기록이 없다고 했다가, 찾아보니 있었다고 하는 경우도 있었다.


싸워서 얻은 문서들. 그 문서들이 모여서 퍼즐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정보공개만 한 것은 아니었다.


2024년 1월부터, 강민호는 시청 앞에서 1인 시위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일주일에 한 번이었다. 반응이 없었다. 그래서 주 3회로 늘렸다. 그래도 반응이 없었다. 결국 매일 나가기 시작했다. 아침 출근 시간에 한 시간, 점심시간에 한 시간. 가끔은 퇴근 시간에도.


면역억제제를 먹는 몸으로, 봄비를 맞고, 여름 볕을 쬐고, 가을바람을 맞고, 겨울 추위에 떨었다.


의사는 말렸다.


"강 씨, 몸 상태가 안 좋아요. 이식 후에 이렇게 스트레스받으면 안 됩니다. 심장에 무리가 가요."


강민호는 대답했다.


"선생님, 제가 왜 살아남았겠어요. 그냥 누워서 텔레비전 보라고 살아남은 건 아닐 거예요."


그의 블로그 방문자 수는 조금씩 늘어나고 있었다. 17명에서 시작해, 100명, 500명, 1,000명. 댓글도 달리기 시작했다. 대부분은 응원이었지만, 가끔 악성 댓글도 있었다.


"정신병자 아냐?"

"뭘 바라고 이러는 거야, 돈?"

"그냥 조용히 살아라"


강민호는 악성 댓글을 삭제하지 않았다. 기록으로 남겨 두었다.


이것도 증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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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면 3 : 닫힌 문들 】



혼자서 싸우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강민호는 도움을 구하기 위해 여러 곳의 문을 두드렸다.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대한법률구조공단이었다.


"복지법인 비리 의혹이 있어서, 법적 조언을 받고 싶습니다."


상담원은 서류를 훑어보았다.


"음... 이건 개인이 제기하기 어려운 사안이네요. 피해자가 누구죠?"


"피해자요? 시민들 아닌가요? 복지법인이 제 역할을 못 하면, 결국 시민들이 피해를 보는 거잖아요."


"그런데 직접적인 피해자가 특정되어야 소송이 가능해요. 강 씨 본인이 직접 피해를 입은 게 있으세요?"


"직접 피해는... 없습니다. 그런데 공익 소송이라는 게 있잖아요."


"공익 소송은 저희가 취급하지 않습니다. 변호사 개인에게 의뢰하셔야 해요. 비용이 많이 들 겁니다."


문이 닫혔다.


시민단체도 찾아갔다. 평강시민연대. 사무실에서 만난 간사는 처음에는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해맑은 법인'이라는 이름을 듣자 표정이 굳어졌다.


"해맑은이요? 그쪽은... 좀 복잡해요."


"복잡하다니요?"


"박영준 대표 아시죠? 평강일보? 그분이 우리 단체에도 영향력이 있어요. 간접적으로. 작년에 우리 행사 후원도 해 주셨고."


"그래서 못 건드린다는 겁니까?"


간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문이 닫혔다.


지역 국회의원 사무실, 시의회 의원 사무실, 중부도 감사관실. 어디를 가도 비슷한 반응이었다.


"검토해 보겠습니다." (연락이 오지 않았다.)

"자료를 더 보내 주세요." (보내도 회신이 없었다.)

"담당자가 자리를 비웠습니다." (항상 비워져 있었다.)


강민호는 깨달았다. 이 도시의 권력 구조 안에서, 해맑은 법인은 '건드리면 안 되는 것'이었다. 조현택의 법률, 박영준의 언론, 한정호의 학계. 그 세 축과 연결된 사람이 너무 많았다.


모두가 그물 안에 있었다.


그물 밖에 있는 것은, 강민호 혼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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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면 4 : 시장의 손길 】



그러던 중, 강민호는 흥미로운 자료를 발견했다.


평강시장의 업무추진비 집행 내역. 정보공개 청구로 받은 자료였다. 업무추진비는 시장이 재량으로 쓸 수 있는 예산으로, 각종 행사 참석, 민간단체 지원, 경조사비 등에 사용된다.


강민호는 최동원 시장의 업무추진비 사용 내역을 분석했다. 3년간의 데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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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동원 시장 업무추진비 민간단체 지원 내역 >

                           (단위: 만 원)


구분              2021년   2022년   202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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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맑은 법인 후원     500      700      800

A복지관 후원        100      100      150

B노인회 후원        150      150      150

C장애인협회 후원    100      100      100

기타 단체 지원      200      250      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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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맑은 법인에 대한 후원금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다른 단체들에 비해 5~8배.


왜일까.


강민호는 최동원 시장의 이력을 조사했다. 최동원은 시장 취임 전, 평강시의회 의원을 두 차례 역임했다. 그 시절의 인맥을 추적해 보니, 조현택과의 접점이 나왔다.


최동원 의원 시절, 조현택 변호사는 시의회 법률 자문을 맡은 적이 있었다. 두 사람은 같은 골프 모임에 소속되어 있었다. 박영준의 평강일보는 최동원의 선거 때마다 우호적인 기사를 실어 주었다.


최동원 시장은 카르텔의 동업자였던 것이다.


아니, 어쩌면 카르텔의 고객이었다.


조현택이 법인을 지배하고, 박영준이 언론을 틀어막고, 한정호가 학계의 권위를 빌려주고, 최동원이 행정의 우산을 씌워 준다. 네 사람이 각자의 영역에서 서로를 보호하는 구조.


강민호는 노트에 적었다.


'법조 + 언론 + 학계 + 정치 = 완벽한 카르텔'


이 카르텔을 깨려면, 네 다리를 모두 쳐야 한다. 그런데 혼자서 네 다리를 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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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리프행어 】



2024년 12월 어느 날 밤.


강민호는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모니터에는 그동안 수집한 자료들이 폴더별로 정리되어 있었다.


147건의 정보공개 청구 결과물.

47회의 1인 시위 사진.

23명의 증언 녹취록.

86개의 문서 스캔 파일.


그리고 아직 공개하지 않은 결정적 증거 하나.


강민호는 그 파일을 열었다. ㈜한빛에너지의 주주명부. 어렵게 입수한 자료였다. 이 명부에는 회사의 실질적 소유자가 누구인지 적혀 있었다.


그는 이름들을 훑어보았다.


어디선가 본 이름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조현택의 가족. 박영준의 친인척. 한정호의 지인. 그리고 최동원 시장과 연결된 사업가.


태양광 임대료가 어디로 갔는지, 이제 알 것 같았다.


강민호는 모니터를 끄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밤하늘에 별이 떠 있었다. 그는 가슴에 손을 얹었다. 심장이 뛰고 있었다. 그의 것이 아닌 심장. 누군가가 남기고 간 심장.


"조금만 더 버텨 줘."


그는 혼잣말을 했다.


"끝을 봐야 해. 여기서 멈출 수 없어."


내일은 감사원에 특별감사를 청구하는 날이었다. 평강시도, 중부도도, 영남도도 움직이지 않는다면, 중앙으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 카드.


강민호는 서류 뭉치를 가방에 넣었다. 서울행 KTX 표는 이미 예매해 두었다.


거대한 벽 앞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그 사람에게는 빌린 심장과 모아 둔 증거, 그리고 포기할 줄 모르는 고집이 있었다.


그것으로 충분한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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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9회 끝 ─


                 다음 회 : 「양지를 향하여」 (최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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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소설은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한 픽션입니다.

등장하는 인물, 단체, 지명은 모두 가명이며,

실존하는 인물·단체와의 유사성은 우연의 일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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