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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소설은 실제 사건에서 영감을 받은 픽션입니다. 등장하는 인물, 지명, 기관명은 모두 허구이며, 실존 인물이나 단체와는 무관합니다. 본 작품은 지방자치 제도의 구조적 문제를 조명하기 위한 사회비판소설입니다.> 




 제2회: 맹지의 연금술




 1


김도형은 등기부등본 스물세 장을 인쇄해서 바닥에 깔았다.


영현시민연대 사무실 바닥은 원래 회색 장판이었는데 종이를 펼쳐놓으니 흰 타일처럼 보였다. 박은지가 맞은편에 쪼그리고 앉아 노란 형광펜으로 소유자 이름에 밑줄을 긋고 있었다. 2024년 8월의 마지막 주 토요일이었다. 에어컨이 없는 사무실에 선풍기 두 대가 돌아가고 있었고, 선풍기 바람에 등기부등본 모서리가 파닥거렸다.


"정리해볼게요."


박은지가 노트북 화면을 돌렸다. 엑셀 시트에 필지별 소유자, 면적, 취득일자, 취득 사유가 정리되어 있었다.


"전체 부지 10,059.4제곱미터. 필지 수 서른일곱 개. 소유자 열네 명. 이 중 문씨 일가가 여섯 명이에요. 문병도, 문상훈, 문상미, 문상철, 문정숙, 문영호. 문병도 씨가 가장 큰 필지를 갖고 있고, 총면적 5,044제곱미터. 전체의 약 50%예요."


김도형이 바닥에 깔린 등기부등본 한 장을 집어 들었다. 서현동 512-29번지. 지목: 답. 면적: 1,287제곱미터. 소유자: 문상훈. 취득일자: 2019년 3월 14일. 취득 사유: 상속.


"이거 봐." 김도형이 그 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취득 사유가 '상속'이야."


"그게 왜요?"


"매매로 취득하면 자금출처 조사 대상이 될 수 있어. 취득세를 낼 때 자금 조달 계획서를 내야 하거든. 그런데 상속은 달라. 피상속인이 사망하면 자동으로 넘어오는 거니까 자금출처를 안 물어. 문병도 씨가 2018년에 돌아가셨고, 다음 해에 상속 등기가 됐어."


박은지가 엑셀 시트를 스크롤했다.


"문상훈 의장 명의로 넘어온 게 512-29 한 필지만은 아니에요. 512-31, 512-47도 같은 날 상속 등기가 됐어요. 세 필지 합하면 2,100제곱미터 정도."


"나머지 문병도 명의는?"


"아직 그대로예요. 사망자 명의로 남아 있는 필지가 여덟 개. 면적으로 치면 2,900제곱미터 정도."


"사망자 명의를 왜 안 바꾸지?"


박은지가 형광펜 뚜껑을 닫으며 말했다.


"상속 등기는 의무가 아니거든요. 2024년부터 의무화됐지만, 그 이전에는 안 해도 과태료가 없었어요. 명의를 안 바꾸면 재산세도 안 나오고, 재산공개 대상에서도 빠져요."


김도형이 고개를 들었다.


"재산공개에서 빠진다고?"


"네. 공직자 재산공개는 본인과 배우자, 직계존비속 명의만 신고 대상이에요. 사망한 부친 명의는 상속 등기를 하기 전까지는 형식적으로 '타인 소유'예요. 물론 실질적으로는 상속인들 거지만."


김도형이 재산공개 자료를 꺼냈다. 영현시의회 홈페이지에서 출력한 것이었다. 문상훈 의장의 2024년도 정기 재산변동 신고 내역.


총재산: 39억 8,224만 원.


항목별로 읽었다. 토지 11억 3,400만 원. 건물 3억 8,100만 원. 자동차 7대 — BMW 730Li, 벤츠 E클래스, 기아 카니발, 제네시스 G80 외 3대. 금융자산 5억 2,000만 원. 채무 16억 1,300만 원.


"서른아홉억이면 적은 건 아닌데." 박은지가 말했다.


"적은 건 아니지. 그런데 문제는 이게 전부가 아니라는 거야."


김도형이 바닥의 등기부등본을 가리켰다.


"여기 보이는 것만 해도, 문병도 명의 미등기 토지가 2,900제곱미터. 공시지가로만 쳐도 평당 200만 원은 넘을 텐데, 그러면 대충 17억에서 18억. 이게 재산공개에 안 잡혀. 그리고 다른 형제 명의 — 문상미, 문상철 — 이쪽에 가등기가 걸려 있는 필지가 또 있어. 이것까지 합하면 일가 전체 토지가 부지의 70%야."


"그래서요?"


김도형이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갔다. 창밖으로 송지구의 아파트 숲이 보였다. 오후 햇살에 유리창들이 반짝였다.


"은지 씨, 이 땅이 원래 뭐였는지 생각해봐. 맹지야. 도로가 없어서 건축이 안 되는 죽은 땅. 자연녹지. 공시지가 평당 50만 원도 안 됐을 거야. 그런데 지금? 제2종일반주거지역. 용적률 233%. 22층 아파트 203세대. 분양가가 평당 2,500만 원은 할 텐데."


그가 돌아서서 박은지를 바라보았다.


"맹지가 어떻게 아파트 부지가 됐는지, 그 과정을 추적해야 해. 10년 치."


 


 2


2011년 가을. 남교신도시 1단계 사업이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었다.


경기도시주택공사가 시행하는 남교신도시 조성사업은 2007년에 착공하여 2012년 준공을 앞두고 있었다. 서현동 일대의 농지와 임야가 택지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기존 마을과 신도시 사이에는 폭 10미터의 완충녹지가 설계되었다. 소음과 분진을 차단하고, 기존 주거 환경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였다.


문제는 그 완충녹지가 문병도의 땅을 둘러싸는 형태로 지정되었다는 것이다.


문병도는 서현동 토박이였다. 아버지 대부터 이 일대에서 농사를 짓던 집안이었다. 512번지 일대의 논과 밭, 과수원이 그의 소유였다. 남교신도시가 들어서기 전까지 그 땅은 별 가치가 없었다. 자연녹지지역. 농사 외에는 쓸모가 마땅치 않은 땅. 아들 문상훈이 시의원이 된 뒤에도 그 땅은 그냥 거기 있었다.


남교신도시가 들어서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신도시 아파트 단지가 바로 옆에 생기자 문병도의 농지는 갑자기 도시 한복판의 빈 땅이 되었다. 하지만 건축은 불가능했다. 완충녹지가 사방을 둘러싸고 있어서 도로 접근이 차단되었기 때문이다. 건축법상 건축물을 짓기 위해서는 폭 4미터 이상의 도로에 2미터 이상 접해야 한다. 완충녹지로 막힌 문병도의 땅은 이 조건을 충족하지 못했다. 전형적인 맹지.


당시 경기도시주택공사 측 실무자가 영현시 도시개발과에 한마디를 던진 것이 기록에 남아 있다.


"완충녹지 안쪽에 현황도로가 있으니까, 그걸로 진출입은 가능할 겁니다."


현황도로. 법적으로 인정된 도로가 아니라, 사실상 사람들이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생긴 길을 말한다. 폭 2미터 남짓의 흙길. 농기계가 겨우 지나다니던 길이었다. 이것을 '도로'라고 부를 수 있는가? 법적으로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 한마디가 이후 10년간의 행정 절차에 씨앗이 되었다.


 

 

 3


한재민이 영현시 도시개발과에 발령받은 것은 2014년이었다.


행정고시 출신은 아니었다. 지방직 7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여 경기도 내 기초자치단체를 전전하다가 영현시로 왔다. 도시개발과는 그의 네 번째 보직이었다. 직급은 사무관. 과장 직함을 달기까지는 아직 몇 년이 남아 있었지만, 실무는 그가 돌렸다. 용도지역 변경, 지구단위계획, 개발행위허가 — 도시의 뼈대를 만들고 고치는 일이 그의 업무였다.


2015년 봄, 한재민의 책상 위에 한 건의 서류가 올라왔다.


'서현동 512번지 일대 완충녹지 해제 요청에 대한 경기도시주택공사 협의 의뢰(안)'


요청의 요지는 이랬다. 남교신도시 조성 당시 지정된 완충녹지가 인접 토지(서현동 512번지 일대)의 진출입을 원천 차단하고 있으므로, 완충녹지 일부를 해제하여 도로를 개설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 요청자는 영현시 건설교통국. 상위 결재선에 국장과 부시장의 서명이 찍혀 있었다.


한재민은 서류를 읽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완충녹지 해제는 원래 잘 되지 않는 일이었다. 완충녹지는 「도시공원 및 녹지 등에 관한 법률」에 의해 도시관리계획으로 결정되는 것이고, 해제하려면 다시 도시관리계획 변경 절차를 밟아야 한다. 그런데 남교신도시의 완충녹지는 경기도시주택공사가 조성한 것이다. 영현시가 혼자 해제할 수 없었다. 공동사업시행자인 경기도시주택공사의 동의가 필요했다.


한재민은 협의 공문을 작성하여 경기도시주택공사에 보냈다.


한 달 후 회신이 왔다.


> '귀 시의 완충녹지 해제 요청에 대하여 검토한 결과, 해당 완충녹지는 기존 주거지역(남교서현 대림아파트 등)의 생활환경 보호를 위해 설치된 것으로, 현 시점에서 해제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판단됩니다.'


부결이었다.


한재민은 회신을 결재선에 올리며 속으로 생각했다. 당연한 결과 아닌가. 완충녹지는 인근 주민을 보호하기 위해 있는 것이고, 그걸 없애면 보호 기능이 사라진다. 경기도시주택공사가 동의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이 건이 여기서 끝나지 않은 것이다.


2018년, 같은 내용의 협의 요청이 다시 한재민의 책상에 올라왔다. 서류의 형식은 조금 달라졌다. '서현동 일대 도시관리계획(완충녹지) 변경 검토 요청'이라는 제목. 첨부 서류가 두 배로 늘었다. 교통영향평가 예비 검토서, 주변 개발 현황 분석, 기부채납 계획 개요서. 전보다 훨씬 정교하게 준비된 서류였다. 누군가가 공을 들인 것이 분명했다.


한재민은 다시 경기도시주택공사에 협의 공문을 보냈다.


두 달 후, 회신.


> '재검토 결과, 기존 입장과 동일하게 해당 완충녹지의 해제는 부적절하다고 판단됩니다. 다만, 인접 토지의 접도 문제 해소를 위한 대안으로 기존 현황도로(인도)의 활용 가능성에 대해서는 귀 시에서 별도 검토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 부결. 그러나 이번에는 마지막 문장이 달랐다. '현황도로(인도)의 활용 가능성'. 경기도시주택공사가 문을 완전히 닫지 않은 것이다.


한재민은 그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 이 한 줄이 나중에 어떤 의미를 갖게 될지, 그때는 몰랐다.

 


 


 4


한재민이 과장으로 승진한 것은 2020년이었다. 도시개발과장. 그의 결재 없이는 용도지역 변경도, 지구단위계획도, 개발행위허가도 나가지 않았다. 물론 최종 결정은 도시계획심의위원회와 시장이 하지만, 실무 검토 의견을 쓰는 것은 과장이었다.


서현동 512번지 건은 2018년 부결 이후 서류상으로는 잠잠했다. 하지만 한재민의 주변에서는 그 건이 완전히 사라진 적이 없었다. 국장과의 업무 보고 자리에서 "서현동 그거 어떻게 됐어?"라는 질문이 간간이 나왔다. "경기도시주택공사에서 안 된다고 했습니다"라고 답하면 그때는 넘어갔다. 하지만 질문은 반복되었다.


2022년, 문상훈이 영현시의회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문상훈은 이미 5선 시의원이었다. 시의회에서 그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고, 시청 공무원들 사이에서도 그의 이름은 자주 회자되었다. 도시계획심의위원회 위원장을 두 번이나 역임했고, 건설교통위원회 위원장도 지냈다. 도시계획에 관한 한 영현시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의장 선출 직후부터 한재민은 미묘한 변화를 감지했다. 직접적인 것은 아니었다. 문상훈 의장이 한재민에게 전화를 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 식으로 하지 않았다. 언제나 사이에 한두 명이 끼어 있었다.


건설교통국장이 점심 식사 자리에서 슬쩍 꺼냈다.


"한 과장, 서현동 그 건 말이야. 시장님도 좀 관심을 갖고 계시거든. 남교신도시 후속 개발 차원에서."


한재민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국장님, 그 건은 경기도시주택공사에서 두 번이나 부결한 건입니다."


"그건 아는데, 꼭 완충녹지를 해제해야만 되는 건 아니잖아. 다른 방법을 좀 찾아보라는 거지."


"다른 방법이요?"


국장이 물을 마시며 말했다.


"경기도시주택공사에서 마지막에 뭐라고 했어? 현황도로 활용 가능성을 검토하라고 했잖아. 그 방향으로."


한재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가 없었다. 현황도로 — 완충녹지 안에 있는 폭 2미터의 인도. 사람이 걸어 다니는 보행로. 그것을 자동차가 다니는 도로로 바꾸라는 뜻인가.


사무실에 돌아와 지적도를 펼쳤다. 서현동 512번지 일대. 완충녹지로 둘러싸인 땅덩어리. 그 완충녹지 안에 점선으로 표시된 보행자 통로가 있었다. 폭 약 2미터. 남교서현 대림아파트 단지와 한양뉴타워 지식센터를 잇는 보행 동선. 아파트 주민들이 아침저녁으로 출퇴근할 때 걸어 다니는 길이었다.


이 인도를 도시계획도로로 변경한다. 그러면 서현동 512번지는 도시계획도로에 접하게 되고, 건축법상 접도 조건을 충족하게 된다. 맹지가 해소된다. 완충녹지는 건드리지 않고도.


한재민은 지적도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기술적으로는 가능하다. 인도를 도시계획시설(도로)로 결정하면 된다. 도시계획시설 결정은 도시관리계획 변경의 일종이니까 도시계획심의위원회 심의를 거쳐야 하지만, 완충녹지 해제와 달리 경기도시주택공사의 동의는 필요 없다. 영현시 자체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범위다.


다만.


한재민은 볼펜을 돌리며 이마를 짚었다. 이것이 과연 합법인가? 보행자를 위한 인도를 차량 통행이 가능한 도로로 바꾸는 것. 국토교통부 협의를 받아야 하는 사안인가, 아닌가. 법령을 뒤져봐야 했다. 그리고 만약 이것이 가능하다 해도 — 누구를 위한 것인가?


서현동 512번지의 소유자가 누구인지, 한재민이 모를 리 없었다. 토지대장은 공적 장부다. 과장이 되면서 관할 구역의 토지 현황을 파악하는 것은 기본 업무였다. 512번지 일대의 최대 소유자가 문병도 — 문상훈 의장의 작고한 부친 — 라는 것을 한재민은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척했다. 아는 것과 인정하는 것은 다른 일이었다.

 


 


 5


2023년 상반기. 서현동 건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서류가 아니라 회의로 왔다. 영현시 도시개발과 주관 'MP(Master Plan) 자문회의'. 외부 전문가를 초빙하여 주요 개발사업의 방향을 자문받는 자리였다. 한재민은 자문위원 명단을 보며 눈썹을 찡그렸다. 도시계획 분야 교수 두 명, 교통공학 박사 한 명, 건축사 한 명. 인선 자체는 무난했다. 문제는 안건이었다.


'서현동 512번지 일대 접도 방안 및 개발 타당성 검토'


자문회의는 시청 8층 대회의실에서 열렸다. 한재민이 현황을 설명하고, 세 가지 방안을 제시했다.


제1안: 완충녹지 해제를 통한 진출입로 확보. 한재민은 이 방안에 대해 "경기도시주택공사와 두 차례 협의하였으나 부결된 바 있음"이라고 적었다.


제2안: 지하 차도를 통한 우회 진입. 부지 서측의 지형 고저차를 이용하여 지하로 차량 동선을 확보하는 방안. "지형적 제약으로 시공성 및 경제성 확보 곤란"이라는 소견을 붙였다.


제3안: 기존 인도(보행자 통로)를 도시계획도로로 변경하여 진출입로로 활용. "경기도시주택공사 협의 불요. 도시관리계획 변경 절차로 처리 가능."


자문위원들의 논의는 예상대로 흘러갔다. 제1안은 이미 두 번 부결되었으니 재추진의 실익이 없다. 제2안은 비용 대비 효과가 낮다. 결국 제3안이 '가장 현실적인 대안'으로 수렴되었다.


자문위원 중 한 명이 물었다.


"제3안으로 가면 국토부 협의는 필요 없습니까?"


한재민이 답했다.


"완충녹지 자체를 해제하는 것이 아니라 완충녹지 내 보행자 통로의 용도를 변경하는 것이므로, 국토교통부 협의 없이 시 차원의 도시관리계획 변경으로 처리할 수 있다는 게 저희 법률 검토 결과입니다."


자문위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회의록에는 이렇게 적혔다.


> '제3안(기존 인도의 도시계획도로 변경)이 현실적 대안으로 판단되며, 법률적 타당성은 시 자체 검토 결과 문제없음.'


한재민은 회의록을 정리하면서 손이 무거웠다. 이 자문회의의 결론이 정해져 있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세 가지 방안 중 제1안과 제2안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선택지였다. 소거법으로 제3안만 남도록 설계된 구조. 자문위원들은 성실하게 검토했지만, 검토의 프레임 자체가 제3안을 향하고 있었다.


누가 이 프레임을 짰는가.


한재민은 그 질문을 하지 않았다.

 


 


 6


2023년 하반기, 절차가 본격적으로 굴러가기 시작했다.


도시관리계획 변경안 작성. 기존 인도를 폭 6미터 도시계획도로로 변경. 동시에 서현동 512번지 일대의 지구단위계획구역 지정 추진. 용도지역은 자연녹지에서 제2종일반주거지역으로 변경. 4단계 종상향.


서류가 쌓였다. 교통영향평가, 환경영향평가, 기반시설영향평가, 경관심의. 각종 협의와 심의가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었다. 한재민의 책상 위에는 매일 결재 서류가 쌓였다가 사라졌다.


그 와중에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한재민의 직통 번호로.


"한 과장님이시죠?"


목소리는 낯설었다. 중년 남성. 부드러우면서도 어딘가 거만한 톤.


"네, 도시개발과 한재민입니다."


"아, 네. 저 서현동 쪽 사업 관련해서요. 좀 빨리 처리가 됐으면 해서."


"실례지만 어디시죠?"


"아, 저는 뭐... 이해관계자 쪽이에요. 자세한 건 전화로 좀 그렇고. 아무튼 과장님이 잘 해주실 거라고 들었습니다."


한재민이 말했다.


"사업 관련 문의는 담당 주무관에게 연결해드리겠습니다. 전화 돌려드릴까요?"


"아뇨, 됐습니다. 그냥 과장님한테 인사드린 거예요."


전화가 끊겼다.


한재민은 수화기를 내려놓고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잘 해주실 거라고 들었습니다.' 누구한테 들었다는 건지.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발신자 표시가 '비공개'였다.


이런 전화가 이후 두 번 더 왔다. 같은 목소리인지는 확실치 않았다. 내용은 비슷했다. "서현동 건 잘 부탁드립니다." "진행이 좀 빨라졌으면 좋겠습니다." 한재민은 매번 사무적으로 응대하고 끊었다.


직접적인 압박은 아니었다. 무엇을 해달라는 구체적 요구도 없었다. 법률적으로 문제가 될 만한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한재민은 알고 있었다. 이런 전화가 오는 것 자체가 메시지라는 것을. '누군가 보고 있다'는 것. '속도를 내라'는 것.




 7


2024년 초, 도시계획심의위원회 안건으로 올라갔다.


'서현동 512번지 일대 도시관리계획(용도지역, 도시계획시설) 변경 및 지구단위계획구역 지정(안)'


심의위원회는 영현시 도시계획 관련 최고 의사결정 기구였다. 위원 15명. 당연직으로 부시장이 위원장을 맡고, 외부 전문가 10명, 시의회 추천 위원 4명으로 구성되었다. 한재민은 간사 역할로 참석했다.


회의 당일, 한재민은 현황을 발표했다. 부지 면적, 용도지역 변경 계획, 기부채납 내역, 교통 대책, 환경 검토 결과. 약 40분 분량의 프레젠테이션이었다.


질의가 이어졌다.


"접도를 기존 인도로 해결한다는 건데, 차량 통행량은 어느 정도로 예상합니까?"


"203세대 기준으로 일평균 차량 통행량은 약 450회로 추정됩니다."


"그 정도면 현재 인도 폭으로 감당이 됩니까?"


"폭 6미터 도시계획도로로 변경하면 왕복 2차로 확보가 가능합니다."


"보행자는요? 지금 그 인도를 보행자들이 쓰고 있지 않습니까?"


한재민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


"별도의 보행자 통로를 부지 내에 확보하는 것으로 계획되어 있습니다."


더 이상의 질문은 나오지 않았다.


심의위원회는 찬성 12, 반대 1, 기권 2로 안건을 의결했다. 반대를 던진 위원이 누구인지, 그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는 회의록에 기재되지 않았다.


2024년 5월, 영현시 고시 제2024-187호. 서현3지구 지구단위계획구역 지정 및 지구단위계획 결정.


용도지역: 자연녹지지역 → 제2종일반주거지역 (4단계 종상향)

용적률: 210% (기본) + 제로에너지 인센티브 23.1% = 233.1%

최고층수: 지상 22층

세대수: 203세대


8월 7일, 지구단위계획 변경 고시. 사업이 확정되었다.


한재민이 고시문에 직인을 찍은 것은 오후 네 시였다. 도장을 찍는 순간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가 빠졌다. 고시문을 서류함에 넣고, 커피를 한 잔 내렸다. 믹스커피. 종이컵에 뜨거운 물을 부으니 갈색 가루가 천천히 풀렸다.


10년이었다. 2015년 첫 완충녹지 해제 요청에서 2024년 고시까지, 정확히 10년. 두 번의 부결을 거치고, 인도를 도로로 바꾸는 우회로를 찾아내고, 자문회의와 심의위원회를 통과시키고. 10년 동안 누군가는 포기하지 않았다.


한재민은 커피를 마시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시청 6층에서 내려다보는 서현동의 풍경. 남교산 자락 아래 아파트 단지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고, 그 사이에 아직 초록빛이 남아 있는 구릉이 보였다. 서현동 512번지. 곧 저 초록도 콘크리트로 덮일 것이다.




 8


김도형과 박은지의 추적은 행정 기록의 미로를 더듬는 작업이었다.


두 사람은 정보공개 청구를 추가로 다섯 건 넣었다. 도시관리계획 변경 결정 전 과정의 내부 검토 서류, MP 자문회의 회의록, 교통영향평가 보고서, 기부채납 협의 내역, 인도의 도시계획도로 변경 관련 법률 검토 의견서. 이 중 자문회의 회의록과 내부 검토 서류는 역시 비공개 처분이 났다.


"패턴이 있어요."


박은지가 비공개 처분 통지서들을 나란히 놓으며 말했다.


"의사결정 과정이 드러나는 서류만 골라서 비공개예요. 결과물은 공개하지만 과정은 안 보여줘요."


"결과만 보면 합법이야. 도시계획심의위원회 의결, 고시, 절차 다 밟았어."


"그런데 과정을 안 보여주니까 검증이 안 되잖아요."


김도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핵심이야. 결과의 합법성이 아니라 과정의 정당성. 누가, 언제, 왜 이 사업을 추진했는지. 문상훈 의장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이해충돌 방지 의무를 이행했는지. 그 과정이 가려져 있어."


박은지가 재산공개 자료를 다시 펼쳤다.


"재산 쪽을 좀 더 파볼게요. 문상훈 의장 총재산 39억 8,224만 원. 이 중에서 서현동 토지가 본인 명의 기준 11억 정도인데요. 공시지가로 신고한 거예요."


"공시지가?"


"네. 재산 신고는 공시지가 기준이에요. 실거래가가 아니라. 공시지가는 실거래가의 60~70% 수준이거든요. 그리고 이건 '본인 명의'만이에요. 부친 문병도 명의 미등기 토지, 형제 명의 토지는 포함 안 돼요."


"미등기분까지 합하면?"


박은지가 계산기를 두드렸다.


"문씨 일가 전체 토지 약 7,000제곱미터. 공시지가 기준으로 대략 33억에서 35억 사이. 실거래가로 환산하면 50억 이상이에요. 여기에 종상향이 완료되고 아파트가 지어지면... 분양 수익 지분 기준으로 추산하기 어려운 금액이 돼요."


"맹지일 때는 얼마였을까?"


"자연녹지 맹지 기준 공시지가는 평당 30만 원에서 50만 원 사이. 7,000제곱미터면 대략 6억에서 10억. 그게 지금 50억 이상이 된 거죠."


"그게 바로 맹지의 연금술이야."


김도형이 나지막이 말했다. 죽은 땅에 도로를 뚫고, 용도를 바꾸고, 층수를 올려서 금으로 바꾸는 연금술. 합법이라는 주문을 외우면서.




 9


그날 밤, 한재민은 퇴근하지 못했다.


시청 6층 도시개발과 사무실에 혼자 남아 있었다. 형광등은 절전 모드로 세 줄 중 한 줄만 켜져 있었고, 모니터 불빛이 그의 얼굴을 하얗게 비추고 있었다.


화면에는 서현3지구 관련 서류 목록이 떠 있었다. 도시관리계획 변경 결정서, 도시계획심의위원회 의결서, 지구단위계획 결정 고시문. 수백 장의 서류. 한 장 한 장에 한재민의 서명이 찍혀 있었다. 실무 검토자. 과장. 간사.


한재민은 의자를 뒤로 젖히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형광등의 흰빛이 눈에 따가웠다.


10년이었다. 2015년에 첫 번째 완충녹지 해제 요청서가 올라왔을 때, 한재민은 사무관이었다. 그때는 단순한 서류 중 하나였다. 경기도시주택공사에서 부결하면 끝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끝났다. 2018년에 두 번째 요청이 왔을 때도, 부결되면 끝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끝났다.


그런데 끝나지 않았다. 2022년, 문상훈이 의장이 된 뒤, 완충녹지를 건드리지 않고 맹지를 해소하는 방법이 찾아졌다. 인도를 도로로 바꾸는 묘수. MP 자문회의라는 정당한 절차를 거쳐서. 도시계획심의위원회라는 법적 기구의 의결을 받아서. 모든 것이 합법이었다. 서류상으로는.


한재민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14일."


그것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인도를 도시계획도로로 변경하는 절차. 주민공람 공고 14일. 관련 부서 협의 약 20일. 도시계획심의위원회 상정에서 의결까지 한 달. 전체 과정이 — 10년 동안 두 번이나 막혔던 그 진출입로 문제가 — 불과 수개월 만에 해결되었다.


내부 대화에서 누군가가 했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쿠폰도 그렇고 이게 최단기간 14일에서 20일 정도 변경이기 때문에."*


최단기간. 14일에서 20일. 10년 동안 안 되던 일이 최단기간에 처리되었다. 왜? 방법이 바뀌었으니까. 완충녹지 해제라는 정공법 대신, 인도를 도로로 바꾸는 우회로를 찾았으니까. 경기도시주택공사 협의가 필요 없는 방법을. 국토부 협의를 건너뛸 수 있는 방법을.


합법. 합법. 합법.


한재민은 그 단어를 곱씹었다. 합법이라는 것은 법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법에 어긋나지 않는 것과 옳은 것은 같은 말인가? 공무원이 그런 질문을 해야 하는가? 공무원의 일은 법과 절차를 따르는 것이다. 법을 만드는 것은 국회이고, 정책을 결정하는 것은 시장과 의회이다. 과장은 실무자다. 실무자는 결정된 것을 집행할 뿐이다.


그런데.


한재민의 시선이 서류 위에 머물렀다. 서현동 512-29번지. 지목: 답. 소유자: 문상훈. 취득 사유: 상속.


이 땅의 주인이 시의회 의장이라는 것. 그 의장이 도시계획심의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는 것. 그의 일가가 부지의 70%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 이 모든 사실을 알면서도 절차가 합법이라는 이유만으로 도장을 찍은 자기 자신.


한재민은 서류 위에 올려놓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밤 열한 시였다. 사무실 밖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시청 건물 전체가 고요했다. 한재민은 모니터를 끄고 불을 껐다. 어둠 속에서 잠시 앉아 있다가 가방을 챙겨 나왔다.


주차장에서 시동을 걸며 혼잣말을 했다.


"14일... 14일 만에 진출입로가 뚫렸어. 10년 동안 안 되던 게."


핸들을 잡은 손이 떨리고 있었다. 한재민은 천천히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바깥은 8월의 열대야였다. 밤공기가 끈적했다. 서현동 방향의 하늘에 아파트 불빛들이 별보다 많았다.


한재민은 그 불빛들을 바라보며 운전했다. 자기가 뚫어준 길 위로, 곧 타워크레인이 서고, 콘크리트가 부어지고, 22층짜리 건물이 올라갈 것이다. 203세대의 불빛이 추가될 것이다.


합법이라는 이름의 연금술.


죽은 땅을 금으로 바꾸는 마법.


그 마법의 수혜자가 누구인지, 한재민은 알고 있었다.




<제3회에 계속>

 

 

 

 

 


 [편집자 주] 용어 해설


1. 현황도로(現況道路)

법적으로 도로로 지정되지는 않았으나, 사실상 통행로로 사용되고 있는 길. 「건축법」에서는 허가권자가 인정하는 경우 현황도로를 접도 요건 충족의 근거로 활용할 수 있으나, 이를 도시계획시설(도로)로 정식 변경하는 것은 별도의 행정 절차를 필요로 한다. 서현3지구 사례에서는 보행자용 인도를 도시계획도로로 변경하여 맹지의 접도 조건을 해소하는 우회적 방법이 사용되었다.


2. MP 자문회의(Master Plan 자문회의)

지방자치단체가 주요 도시개발 사업의 방향성을 검토하기 위해 외부 전문가를 초빙하여 개최하는 자문 회의. 법적 구속력은 없으나, 이후 도시계획심의위원회 심의의 사전 정지 작업으로 기능하는 경우가 많다. 자문 결과가 특정 방향으로 유도되는 구조적 문제가 지적되기도 한다.


3. 도시관리계획 변경

「국토의 계획 및 이용에 관한 법률」에 따라 용도지역, 용도지구, 도시계획시설 등을 결정하거나 변경하는 행정 행위. 시·군이 입안하고, 도시계획심의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확정된다. 용도지역 변경(종상향)은 토지 가치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므로 이해충돌의 소지가 큰 영역이다.


4. 이해충돌 방지 의무

공직자가 직무 수행 과정에서 자신의 사적 이해관계와 공적 직무 사이에 충돌이 발생할 경우, 이를 신고하고 회피하여야 하는 의무. 「공직자의 이해충돌 방지법」(2022년 시행)에 따라 공직자 본인뿐 아니라 배우자, 직계존비속의 이해관계도 신고 대상이다. 다만 지방의회 의원의 경우 적용 범위와 실효성에 대한 논란이 존재한다.


5. 제척(除斥)

위원회 심의에서 특정 안건에 이해관계가 있는 위원이 해당 안건의 심의·의결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배제하는 제도. 도시계획심의위원회에서는 심의 대상 토지의 소유자 또는 그 친족이 위원인 경우 제척 사유에 해당한다. 제척 여부의 확인과 이행은 위원 본인의 자진 신고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아, 실질적 이행 여부가 쟁점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