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 맑 은 거 짓 말
제2부 「구원자의 탈」
제5회 「복지대통령의 그림자」
━━━━━━━━━━━━━━━━━━━━━━━━━━━━━
※ 이 소설은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한 픽션입니다.
등장하는 인물, 단체, 지명은 모두 가명이며,
실존하는 인물·단체와의 유사성은 우연의 일치입니다.
━━━━━━━━━━━━━━━━━━━━━━━━━━━━━
【 프롤로그 】
평강시청 5층. 복지국장실.
2004년 가을, 윤재호 복지국장의 하루는 결재 서류와 함께 시작되었다.
58세. 복지 분야 30년. 9급 공무원으로 시작해 복지국장까지 올라온 입지전적 인물이었다. 평강시 내 사회복지법인 인허가, 보조금 심사, 시설 지정 취소까지, 복지와 관련된 모든 결정이 그의 책상을 거쳐 갔다.
지역 복지계에서 그를 부르는 별명이 있었다.
'복지대통령'.
누구도 대놓고 그렇게 부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의 결재 한 줄이 법인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의 전화 한 통이 감사를 무마하고, 그의 추천 한 마디가 인사를 좌우했다.
오늘 아침에도 결재 서류가 수북했다. 윤재호는 서류 더미 사이에서 한 장을 집어 들었다.
'사회복지법인 해맑은 관선 이사 파견 건.'
서류 귀퉁이에 누군가 연필로 적어 놓은 메모가 있었다.
'국장님 지시대로 처리함.'
윤재호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결재란에 도장을 찍었다.
<내용 이해를 돕기 위해 AI 로 생성한 이미지입니다>
【 장면 1 : 밀실의 회동 】
일주일 전.
서울시 서남구 대현동의 한 고급 한정식집. 개인 룸.
네 사람이 둘러앉아 있었다. 조현택, 박영준, 한정호. 그리고 한 사람 더. 양복 차림에 은발이 섞인 머리칼. 윤재호였다.
조현택이 먼저 입을 열었다.
"국장님, 평강시에서 해맑은 복지원에 관선 이사를 파견한다고 합니다."
"들었어."
윤재호는 술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말을 아끼는 사람이었다.
"시신 사건 때문에 법인을 정상화해야 한다면서요. 근데 어차피 평강시가 알아서 처리할 일인데, 저희한테 연락을 주신 건..."
"자네들이 적임자야."
조용하지만 단호한 목소리였다.
박영준이 물었다.
"저희가요?"
"법조, 언론, 학계. 이보다 완벽한 조합이 있나? 자네는 변호사니까 정관을 손볼 수 있고, 박 대표는 기사를 막을 수 있고, 한 교수는 감사를 정리할 수 있어."
한정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근데 관선 이사는 평강시장이 임명하는 거 아닙니까?"
윤재호는 피식 웃었다.
"평강시장이 누구한테 자문을 구하겠나. 복지법인 문제면 당연히 복지국장한테 물어보겠지. 내가 적임자 세 명을 추천하면, 그대로 가는 거야."
세 사람은 눈을 마주쳤다. 윤재호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30년간 쌓아온 네트워크. 평강시장도, 사회복지과장도, 담당 주무관도, 모두 그의 영향력 안에 있었다.
조현택이 물었다.
"국장님은 뭘 원하십니까."
"나? 나는 2년 뒤에 정년이야."
윤재호는 빈 잔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퇴직하고 나서 갈 곳이 있으면 좋겠어. 자문역이든, 고문이든, 이름이야 뭐든 좋고. 자네들이 법인을 잘 운영하면, 나도 한자리 있겠지."
조현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윤재호는 목소리를 낮췄다.
"해맑은 법인 자산 현황, 내가 알아봤어. 영남도 청산시에 17만 평짜리 땅이 있더라고. 기부받은 거라던데, 활용도가 거의 없어."
세 사람의 눈빛이 변했다.
"나중에 그 땅을 어떻게 쓸 건지... 그건 자네들 마음이지."
윤재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 만난 건 없었던 걸로 하세."
【 장면 2 : 검토 생략 】
나는 이 정보를 어떻게 얻었는가.
2024년 가을, 나는 평강시청에서 퇴직한 전직 공무원을 수소문했다. 윤재호 곁에서 근무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윤재호의 결재 스타일을 이렇게 설명했다.
"국장님은 서류를 두 종류로 나눴어요. '일반'과 '특별'."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일반 서류는 담당자들이 검토하고 올려요. 국장님은 결재란에 도장만 찍으면 돼요. 그런데 특별 서류는 달랐어요. 담당자 검토 없이 곧바로 국장님한테 올라왔어요."
"검토 없이요?"
"네. 서류 귀퉁이에 연필로 '특별'이라고 써 있으면, 담당자들은 건드리지 않았어요. 국장님이 직접 처리하시는 건으로 알았죠."
나는 정보공개 청구로 받아낸 당시 문서들을 다시 살펴보았다. 해맑은 법인 관련 서류 중 일부에, 희미하지만 연필 자국이 남아 있었다.
'특별'.
관선 이사 파견 결정. 정관 변경 보고 접수. 이사 선임 보고 접수.
모두 '특별' 서류였다.
담당자가 검토하면 이상한 점을 발견했을 것이다. 왜 관선 이사 임기가 끝난 사람들이 고문으로 남는가. 왜 정관에서 승인 요건이 사라지는가. 왜 같은 사람들이 9년 뒤에 정이사로 돌아오는가.
그러나 검토는 생략되었다.
'국장님 지시대로 처리함.'
연필로 쓴 이 한 줄이, 모든 절차를 우회했다.
30년간 쌓은 권력. 그것은 서류 한 장을 '특별'로 만들 수 있는 힘이었다.
【 장면 3 : 충성파 네트워크 】
윤재호의 영향력은 시청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30년간 복지 분야에서 일하면서 쌓은 인맥은 거대한 그물망이었다. 평강시 관내 사회복지과 담당자들, 사회복지법인 원장들, 사회복지사협회 간부들, 심지어 중부도에서 감사를 나오는 감사관들까지.
"윤 국장님이 밀어주는 사람은 건드리지 마라."
이것이 불문율이었다.
나는 해맑은 법인의 관선 이사 사임 처리 과정을 추적했다. 2008년, 조현택, 박영준, 한정호 세 사람이 관선 이사직에서 사임했을 때, 처리 담당자는 평강시 사회복지과 김모 주무관이었다.
김 주무관은 이미 퇴직한 상태였지만, 만나는 데 성공했다.
"그때 사임서 처리하실 때, 이상한 점 없었습니까?"
"이상한 점이요?"
"관선 이사가 사임하면서, 같은 날 법인 고문으로 위촉되는 게 정상입니까?"
김 주무관은 오래 침묵했다. 그리고 한숨을 쉬었다.
"복지국장실에서 전화가 왔어요."
"복지국장실이요?"
"네. '해맑은 건은 알아서 잘 처리해라. 이상하게 문제 삼지 마라.' 그런 취지였어요. 누가 전화했는지는 밝힐 수 없지만... 국장님 측근이었어요."
"그래서 그냥 처리하신 겁니까?"
"공무원이 국장님 지시를 어떻게 거부해요. 인사철에 어디로 쫓겨날지 모르는데."
그는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솔직히 그때 뭔가 이상하다는 건 느꼈어요. 근데 저 하나 목소리 낸다고 뭐가 달라지겠어요. 그냥 시키는 대로 한 거예요."
5년간의 위장 사임.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윤재호의 '전화 한 통' 때문이었다.
평강시 담당자도, 시청 감사관도, 아무도 해맑은 법인을 건드리지 않았다. 복지대통령의 그림자 아래서, 법인은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었다.
【 장면 4 : 등기부의 비밀 】
2008년부터 2013년까지, 해맑은 법인의 등기부등본에는 조현택, 박영준, 한정호의 이름이 없었다.
그러나 같은 기간 법인의 이사회 회의록에는, 세 사람이 '배석'으로 참석한 것이 기록되어 있었다.
고문 조현택. 자문위원 박영준. 감사자문 한정호.
배석자는 의결권이 없다. 서류상으로는 참관인에 불과하다. 그러나 내가 입수한 이사회 녹취록에는 다른 현실이 담겨 있었다.
────────────────────────────────────
녹취 일시: 2011년 5월 정기 이사회
이사 A: 다음 안건은 시설 개보수 예산입니다.
조현택: (끼어들며) 그건 보류합시다. 지금 자금을
다른 데 써야 해요.
이사 A: 아, 네. 그럼 보류하겠습니다.
다음 안건...
조현택: 아, 잠깐. 다음 안건 전에, 청산시 토지
관련해서 내가 할 말이 있어요.
────────────────────────────────────
'배석자'가 안건을 결정하고 있었다.
등기부에 이름이 없는 사람이, 법인의 모든 것을 좌우하고 있었다.
어떻게 가능했는가.
답은 간단했다. 이사회에 앉아 있는 5명의 '정식 이사'들이 모두 조현택의 측근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법률사무소 직원, 그의 사업 파트너, 그의 친인척. 그들은 이사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조현택의 손발이었다.
이사회는 형식이었다. 의결은 연극이었다.
진짜 결정권자는 등기부 바깥에 있었다.
그리고 그 바깥에, 더 큰 그림자가 있었다.
윤재호.
조현택은 가끔 이사회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건 윤 국장님한테 먼저 여쭤봐야 해."
퇴직한 공무원이었다. 법인과 공식적인 관계가 없는 외부인이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여전히 힘이 있었다. 시청 후배들에게, 지역 복지계에, 그리고 조현택에게.
【 클리프행어 】
2013년 3월.
조현택, 박영준, 한정호가 해맑은 법인의 정이사로 복귀한 날.
취임식은 조촐했다. 법인 회의실에서 열린 간단한 행사. 참석자는 이사들과 직원 몇 명뿐이었다.
행사가 끝나고, 조현택은 복도에서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국장님, 조현택입니다. 오늘 취임했습니다."
전화기 너머로 윤재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축하하네. 9년 걸렸군."
"국장님 덕분입니다. 약속드린 대로, 자문역 자리 준비해 두겠습니다."
"그건 나중에 이야기하세. 청산시 토지는 언제 착수할 건가?"
"내년 상반기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태양광 사업으로 방향 잡았습니다."
"좋아. 영남도 쪽 담당자한테 말해 둘게. 서류는 알아서 처리될 거야."
전화가 끊어졌다.
조현택은 창밖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했다.
"복지대통령이 밀어주면, 못 할 게 없지."
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시신 위에 세워진 법인. 그 법인을 9년에 걸쳐 삼킨 세 남자. 그리고 그 뒤에서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 그림자.
해맑은 법인의 진짜 주인은 누구인가.
등기부에 적힌 이름들인가, 아니면 등기부 바깥의 이름인가.
나는 수첩에 적었다.
'윤재호 - 모든 것의 시작점.'
그 이름 아래 밑줄을 그었다.
━━━━━━━━━━━━━━━━━━━━━━━━
─ 제5회 끝 ─
다음 회 : 「무자본 인수의 마법」
━━━━━━━━━━━━━━━━━━━━━━━━━
※ 이 소설은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한 픽션입니다.
등장하는 인물, 단체, 지명은 모두 가명이며,
실존하는 인물·단체와의 유사성은 우연의 일치입니다.